역사와 현실

인조임금의 굴욕적인 항복의 원인

두무동 2009. 6. 15. 12:44

인조임금의 굴욕적인 항복의 원인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은 노비들에게 품계를 없앤다는 약속을 했다.

그래서 각 지방의 노비들은 의병활동을 자원 했지만.

임란이 끝나고 임금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명나라와 전쟁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병자호란은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청 태종이 1636년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그러나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지킬 뿐

조선 조정은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하여 청군이 침입해서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서둘렀다.

청군은 남한산성까지 진군해서 포위한 두달만에 임금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고

세자와 왕손 일부 조정은 강화도에 피난을 했지만 청 장군용골대와 누루하치가

남한산성을 포위한지 두달만에 인조임금은 조선 역사처음으로 가장 굴욕적으로

삼전도 까지 가서 누루하치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椵島)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이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청태종 누루하치는 돌아갔으며,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돕게 하여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되었다.

이렇듯 임금이 백성과 한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임금을 돕는 백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전장에서 장계 한장 보내오지 않았다.

 

조선의 궁터를 잡으면서 남향을주장한 정도전과 동향을 주장한 무학대사와의 

다툼에서 정도전의 좌향이 받아들여져 남향으로 경복궁이 자리하게 되었다.

두사람의 다툼은 좌청룡의 싸움이었다.

 

즉 좌청룡이 좋아야  장남이 잘된다는 이치를 무학은 알고 있었고 무학의  

장대로면 북한산이 좌청룡이 되어 정말 좌청룡으로는 으뜸이다, 

그러나  정도전의 남향은 남산이 좌청룡이라 남산은 규모가너무 적은 좌청룡으로는  

제가 있는산이었다  고로 이조오백년동안 장자가 임금이 된사람은 단종과    

종 밖에없다 둘다 한명은 삼년만에 병사 한명은 세조 삼촌에게 단종애사라

좌청룡 중요하다 목욕탕의 남탕은 좌측에있다 결혼식때 남자가 왼쪽에 선다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다. 문관은 좌측에서고 무관은 우측에선다.

 

이게 문제가 아니고 정도전의 경복궁궁터를 괴롭히는 것은 관악산이었다.

그형상이 마치 관머리와 같이 뾰족하여 관악이라 이름한것이다, 관악이 화체

화산(火體火山)으로 남방왕화가 지나치게 장안을 비추고 있어 예부터 화재의

난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궁중에서도 몇번의 화난을 당했고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때 관악에 화기를

누르기위해 인근산에 우물을팠고,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위해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붙였다 그런 숭례문이 화

재를 당했다  관악산 아래 과천이 있다 과천은 정부종합 청사가 있다.

많은 공무원들의 원성이 높다 신정부의 내각축소로 안절부절 시끄럽다, 공무

원의 분노가 불로 변한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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