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사람 - 김 명 현 - ◇ 6월의 짙은 신록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잎이 무성하므로 나무는 보이질 않고 나뭇잎들이 온산을 감싸고 있습니다. 나무라는 본체는 잎들의 기둥으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과 비와 햇살과 호흡을 하며, 바람은 자주 찾아오는 친구기도 합니다. 서늘한 햇살이 많은 여름에는 그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꼭 여름이 아니더라도 산에 있는 나무들은 등산객들이 자주 보러 옵니다. 그 등산객들에게 나무는 따로 선심을 쓴 것도 없고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과 새들은 숲을 찾아옵니다. ◇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어서 이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철마다 예쁜 옷을 갈아입고 겨울바람이 차면 옷을 훌훌 벗고 몸을 가늘게해서 그 바람을 작게 맞습니다. 나무는 스스로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정靜적인 삶입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쏘다니기를 좋아하다보니 문제가 많이 생기나 봅니다. 이웃과도 잘 지내야하고 멀리 있는 사람에게도 가서 궁금한 것을 물어야합니다. 여러 사람을 상대로 친구를 맺자고 애원합니다. 깊게 내리는 뿌리가 없다보니 사람들은 조상을 뿌리라고 말해옵니다. 조상은 즉 과거가 됩니다. 나무들는 조상이 대부분이 열매이므로 조상은 자식일 뿐이고, 과거나 미래가 없는 현재만 있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는데는 소홀함이 없습니다. 나무는 뿌리만 있으면 되지 조상과 과거따윈 생각지도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조상입니다. 직립한 모양은 나무와 같지만 사람이 나무처럼 두 발을 땅에 심고 있으면 금방 죽고 말 것입니다. 나무나 사람은 죽으면 가로로 눕습니다. 서서 그리고 바쁘게 살았기 때문에 누워서 편안해지고 싶어서 일 것입니다. ◇ 사람들은 두 발로 여러 곳들을 움직여 이동하며 살아가고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좋은 것을 갇고 싶어 하게 되고 욕심도 생기고 이웃과 반목과 갈등이 생겨 과거의 조상을 핑계로 현실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다 조상과 뿌리는 같은 말이 되고 역사도 생겼습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 역사를 배웁니까? 이웃과 잘 친해지기 위해서 역사를 배웁니까?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역사를 배웁니까? 역사는 현재에 만족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면 과거를 돌아보게 되고 미래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함은 현재가 부족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기위한 그런 이유가 되고맙니다. ◇ 비우는 것을 터덕하기위해 그 정적인 삶을 배우기위해 산을 찿아 갑니다. 그기서 조용히 숨쉬고 있는 나무들을 보며 돌아와서도 나무가 항상 그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수양하는 곳에는 나무들이 많습니다.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님들은 가만이 앉아 있어야 뭔가 얻어지는 것이 있나 봅니다.
◇ 이동이란 수단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사람들은 모두 더욱 바빠졌습니다. 걸어 다니기도 부족해서 달리고 날아다녀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제는 인공위성으로 쏘아서 더 빠르게 움직이게 하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빨리 움직여야 하고 동動적인 인간이 되고맙니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나무와 숲은 그들의 존재를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찾아주는 사람이 있고 나무더러 움직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자리가 시원하다고 비켜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인간들이 구축물을 짓기 위해서 어쩔 수없이 비켜주거나 강재로 이동이 되어지기도 하지만 자기가 직접 이동은 하질 않습니다. 나무는 뿌리를 가지고 한 곳에 정착하면서 여러 이웃들을 사겨두었습니다. 이웃이 스스로 찾아오게 숲을 이루고 열매도 사람들에게 제공합니다. 그래서 할 일도 하면서 외롭지 않습니다. ◇ 사람들도 자기가 지켜야 할 자리에 본분을 다하며 지키고 있을 때 찾아주는 이웃은 저절로 생기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에 애착을 가지고 나무처럼 깊은 뿌리를 내리면 편안하고 걱정이 없는 삶이 됩니다. 많이 다니는 것은 에너지를 소모하기도하고 나 말고 다른 사람까지 바쁘게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 것이 쉬는 것이고 만사가 편아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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