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족대 문앞 입구 관리소
조선 사화 무-갑-기-을
바른 임금을 섬기기위한 충정으로 우리 선조들의 피의 숙청과
귀향 그리고 사화의 중심에서 벗어나 낙향하던 선인의
발자취다.
삼족대
훈구파, 유자광.이극돈 등이 사림파,조광조의 문하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권오복. 이목.허반...등
성종의 총애를 받던 김종직이 춘추관 사관으로 있을 때
단종의 억울한 죽음이 초나라 회왕(의제)이 조문한다는 뜻으로 제문을
사초에 실어 단종의 죽음을 억울해 한다는 이유로
연산군은 이 일족들을 부관 참신까지 시켰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일손, 충과 의기로 이루워온 영남학파의 주류로
청도의 창량한 물에 의족을 씻고 갓끈을 메겠다던 탁영자(濯纓子) 김일손,
34세에 정오품 벼슬만 했는데도 그의 기계가 무량해
시기의 대상으로 서자 아들 김청이 김숙이까지도 모두 죽음을 당하던
우리 선조들의 암울한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돌아 갈 수 없는 나는 우리 선조가 삼족을 면하고픈 마음으로
사당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으로 해석해본다.
얼마나 원한이 젔길래 이후로 우리의 문중에 벼슬을 내지 않고
첩첩한 청도에서 초야에 푹 묻혀 버렸을까.
그 이후로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조선의 역사에 이름을 올렸을까.
나는 기계가 높으시고 정도정치에 출중한 선조의 흔적이 서린
발치에서 한량하게 내려다 보이는 강물을 바라본다.
후학들이나 가르치다가 여생을 보낸 그리고
벼슬을 하는데 도움 주는 학문을 가르치지 않은 우리 선조,
선현 조선의 김홍도는 지도로 그림으로 역사를 쓰고
가르침의 敎에 익숙해 왔나보다.
우리 문중으로 시집와 맞이 종손 역을 하고있는 나의 내자는
내가 고지식하고 우유부단하고 고집세다고 날마다
핀잔을 주더니 웃는 것을 보아 오늘에사 역사관에 좀 눈을 뜨고
내게 우호적으로 좋은 별호 하나쯤 달아 줄 것 같다.
청도에 있는 김일손지묘